내가 자식을 낳는다면 그것은 딸이어야 했다. 그리고 내게 딸이 있다면 그것은 나를 닮아야 했다. 웃을 때 올라가는 나의 입꼬리를, 나의 눈을, 나의 사고회로를 닮아야 했다. 심지어는 불안할 때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마저 닮아야 했다. 그 애는 나와 똑같아야 했다.
내게 있어서 자식이란 것은 두 번째 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상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 두 번째 나, 새로운 버전의 나라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자원이었으니.
수많은 부모가 하는 실수가 있다. 자식에게 자신을 투영하여 채찍질하는 것. 그리고 나는 그 행동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변명해봤자 나 역시 전형적인 통제형 부모의 모습을 띄고 있었기에.
그들과 나의 차이점이라면 그들은 이미 자식을 낳아 키웠고, 나는 아직 자식은 고사하고 결혼도 하지 않은 이십대라는 점이다. (그런데 과연 자식과 결혼은 한 세트인가?) 그러므로 나는 얼마든 미래 자식을 위한 양육관을 바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뀌려나?
십 대까지만 해도 결혼을 하더라도 자식을 가질 생각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아이를 징그러워했고, 해코지를 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신생아든 걸음마를 뗀 아기든 할 수만 있다면 짓이기고 싶다고 어머니께 무심코 말했던 것이 떠오른다. 그날 나의 어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하셨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내게 나를 닮은 자식 하나만 낳아달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내가 자식을 낳으면 안 되는 사고관을 가졌다고 하시면서도 이러시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손주를 보고 싶은 가벼운 마음?) 또한 아픈 게 싫었다. 나는 내 몸이 너무 소중해서 몸에 해가 될 짓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이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더라도, 아픈 게 싫어서 선뜻 낳겠다는 소리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내가 이제 와 아이를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나는 진실로 ‘갖고 싶었다’. 나와 똑같은 여자애를 만들어서, 나의 성장 과정에서 아쉬웠던 부분을 모두 제거한 채 완벽한 환경에서 양육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 애는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얼만큼 도약할 수 있을까.
이러한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선 나의 성장 배경을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2002년 여름에 태어났다. 외가 친가를 통틀어 첫 아이였다. 좀처럼 웃는 법이 없어서 다들 걱정했다고 한다. 걸음마는 느렸고, 말은 빨랐다. 기억나지 않는 시절의 얘기를 하는 이유는 최근 어머니께 들은 고백 때문이다. 어머니는 내 동생이 태어날 무렵(2004년)부터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하셨다. 내가 젖을 떼게 하기 위해 어머니의 젖꼭지에 식초를 바르기도 했다고 하셨다. 그 때문인지 나는 시큼한 것을 아예 입에 대질 못한다. 또한 동생이 태어나고서 일 년 정도 어머니께선 산후우울증을 앓으셨는데, 그때 내게 신경을 많이 쓰지 못하셨다고 하신다. 그때부터 내가 손가락을 빨기 시작했다고.
그걸 듣고서야 지금껏 품어온 의문이 풀렸다. 나는 언제나 궁금했다. 자타공인 사랑을 받으며 자란 내가 왜 불안에 떠는 인간으로 성장했는지 말이다. 그런 인간이 되려면 어릴 때의 트라우마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게 편협한 나의 사고였다. 그러나 그 편협함이 적어도 내게는 들어맞은 것이다. 기억도 못 하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동생을 신경 쓰느라 나를 홀대한 것이 무의식에 남아 나를 이다지도 한심한 어른으로 크게 만들었다.
억울한가? 어쩌면 조금은. 하지만 이제와 이십 년도 전의 일에 집착하며 자기 연민을 느낄 필요는 없다. 내 불안한 정신건강에도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일러둔 채 넘어가겠다.
나의 최초의 기억은 아마 대여섯 살로 추정된다. 그때부터 유년기~청소년기 내내, 나는 사랑을 듬뿍 받았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과보호를 받았단 얘기다. 앉아만 있으면 모든 걸 부모님이 해결했다. 나는 그저 더 짜증내는 법, 화를 내는 법만 익히면 됐다.
똑똑하단 칭찬이야 항상 들은 것이지만, 초등학교에 올라가며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부모님이 나를 끌고 정신과를 간 것이다.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이상한 행동을 했나? 사회성이 너무 떨어졌나? 어쨌건 그곳에서 지능 검사 같은 걸 왕창 받았던 기억이 난다) 진료 결과 나는 좌우뇌 불균형을 판정 받았는데, 이는 높은 지능과 낮은 주의력의 갭을 의미했다. 그 갭을 매우기 위해 나는 매주 수요일마다 학교 시간을 빼고 병원을 다녔다. 어린 내겐 ‘매우 높은 지능’이 값진 훈장이었다. 꼬리표처럼 따라오는 낮은 주의력 따윈 가볍게 무시했다. 재능에 매몰되어 끈기와 같은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 어린아이들의 특징이었으므로.
거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내가 특별하다고 믿었고, 최고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보통은 또래와 어울리며 그러한 믿음이 박살나고 어른이 된다. 그러나 나는,
첫째. 또래와 잘 어울리지 않았다.
둘째. 또래와 어울릴 때조차 내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일단 중학교 시절은 첫 번째 이유가 강했다. 그때의 내겐 사회성이란 것이 없었다. 남들 다 하는 페이스북도 하지 않았고, 연예인도 몰랐으며, 그 외의 공감대에도 공감을 하지 못했다. 혼자 있을 때만이 진정으로 기뻤다.
고등학교 시절은 두 번째 이유였다. 그때부터는 최소한의 눈치를 장착하여서, 친구들이 슬퍼할 때면 함께 슬퍼하는 시늉을 할 수 있는 인간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친구에게 일정 선 이상의 애정을 쏟는 법을 알지 못한다. 친구뿐만 아니라 부모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말이다. 그들에게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